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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는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없는가?

이미지 소스는 네이버 옛날 기사 아카이브에 있는 기사 중 '만화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 메인 이미지. 웃기지도 않는다.

 

며칠 전 만화 칼럼니스트를 하고 있는 지인이 겪은 일이다. 어떤 사람과 함께 앉아 말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분이 "만화를 갖고도 칼럼 같은 걸 쓸 수 있다니 놀랐네요. 만화는 저급 문화라서 그런 게 가능할 줄은 몰랐는데…." 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상대방에 대한 예의나 만화가 정말 저급 문화인지는 둘째치고, 비평의 대상에 차등을 두는 것에서 기가 막혔다.

 

이런 인식은 이미 주변에 흔하게 펴져 있다. 나 또한 앞서 지인이 겪은 것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만화로 비평문을 쓸 수 있냐"는 소리를 여럿 들어왔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볍게 "좋아서 하는 일인데"라고 받아 넘기지만 솔직히 기분은 매우 착잡했다. 그런 분들의 인식대로라면 클래식이나 미술같은 속히 '고급스럽다'고 일컫는 분야에만 비평이 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영화나 TV 드라마 비평을 보면 깜짝 놀라 혼절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비평을 할 수 있는 문화의 대상은 정해져 있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연히 정해져 있지 않다. 개인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 자신만의 의견을 갖고, 그 의견을 정제하고 논리정연하게 표현한 것이 리뷰 · 비평 · 평론이다. 오히려 문화는 적절한 비평을 통해 발전한다. 대표적으로 영화계의 사례를 들 수 있다. 90년대 전까지만 해도 단순한 소개 기사나 배우의 인기를 주로 소개하던 영화 기사는 씨네필(cinephile, 영화광을 일컫는 영어 단어)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씨네21』과 『KINO』(키노)의 등장으로 일대 변혁을 맞았다. 영화에 대한 심도있는 비평과 담론이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단순하게 흥행만을 노린 영화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서서히 평론가와 관객 모두를 만족시키는 영화가 점차 쏟아져 나왔고 결국 한국 영화계는 2003년, 르네상스를 맞게 되었다. 단순한 유희거리로 치부받던 영화는 문화예술을 상징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만화도, 대중 음악도, 인터넷 문화도 적절한 비평이 공존해야지 순조롭게 성장할 수 있다. 단순히 보도 자료에 의존하는 홍보성 기사, 편견에 사로잡혀 무작정 까고 보는 비난성 기사가 계속 쏟아져 나올 수록 그 분야는 점점 생기를 잃는다. 칭찬과 비판이 호응해 콘텐츠 제작자와 수용자가 성찰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야 한다. 즉, 비평은 문화에 있어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영화나 대중 음악 등이 평론의 가치를 인정받고 발전한데 비해 만화의 평론은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자동차 몇 만대를 수출하는 것보다 만화영화 하나를 수출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립서비스를 하면서도, 한편에서는 만화를 '불량하다'고 비하하는 이중 잣대는 이런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 90년대 초중반에 한참 만화계가 성장 구도를 달리고 있을때 이곳저곳에서 만화 평론을 하던 사람들이 모여 한국만화평론가협회를 결성했지만 청소년보호법 사태 등으로 인해 만화에 대한 시선이 급격하게 나빠지면서 곧 유명무실한 단체가 되었다. 활발했던 평론이 한풀 꺽이면서 동시에 만화에 대한 이슈도 인기를 상실하고 말았다. 신문과 잡지에서 만화 리뷰는 커녕 기사 하나 찾기 힘든 상황이다. 2010년 현재 만화 · 소년 · 아동 대상 매체를 제외하고 정기적으로 만화 리뷰 · 평론을 게재하는 매체는 본지를 포함해 <기획회의> · <씨네21> · <전자신문> 등 채 열 곳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만화를 중심으로 한 '가벼운' 문화 웹진 <컬쳐밤>(CultureBomb)이 오는 3월 2일 창간을 앞두고 있을 뿐이다.

 

모든 문화는 서로 급을 따질 수 없을 만큼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고유한 성격을 지닌 만큼 각각의 성격을 콕 집어내어 분석할 수 있는 좋은 평론이 당연히 필요하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문화에 억지로 급수를 매기고 평론을 하찮게 취급하는 사람은 계속 나올 것이다. 개인의 행동을 함부로 방해할 수 없지만, 그 행동이 몰상식한 행동이라는 사실은 알고서 행동해야 할 것이다.

 

 

- 2010년 2월 22일,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용으로 쓴 글. 개인적으로 앞서 언급한 일을 글로써 보았을 때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분이 그 일에 대해 썼던 글로 후기를 대신하고자 한다.

 

저런 이들 앞에서 '만화가 저급문화라니!'라며 화를 내는 건 우스운 일입니다. 어떤 이들에겐 SKY가 아니면 3류 대학인 게 '진리'고, 어떤 이들에겐 클래식이 아닌 음악은 비천한 게 '진리'죠. 다만 그러한 '생각' 자체가 얕은 것 또한 '진리'.

쉽고 공감가는 글만 쓰면 최선인 것일까

한 교수의 글이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 블로그들의 집합체 또는 블로그들의 커뮤니티를 의미하는 용어)에 큰 파장을 주고 있다. 문제의 단초는 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 중에 있는 이택광 씨가 개인 블로그에 걸그룹 '소녀시대'가 정규 2집 발매와 맞추어 발표한 뮤직 비디오 「Oh!」에 대한 비평을 남긴 것이었다. (http://wallflower.egloos.com/2767972) 어려운 인문학적 개념을 사용해 이해가 쉽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소녀시대의 새 뮤직 비디오는 남자들의 본능을 자극하는 일종의 판타지이다' 라는 내용의 글이다.

 

그리고 이 비평문은 글이 처음 올라온 이택광 교수의 블로그가 속해있는 블로그 전문 사이트 '이글루스'와 DC인사이드에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글이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들다.' 는 이유가 비난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정작 글에 사용된 개념에 문제가 있다거나 등 글 내용 자체에 대한 비판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즉, 대중적이지 않은 글을 썼다는 이유로 거센 비난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일부는 이 교수가 예전부터 특이한 성향의 분석 · 비평글로 주목을 받아왔으니 큰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한다. 또 누군가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라면 마땅히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가능하면 글은 전문층만 보는 매체에 실리지 않는 이상 최대한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작성되어야 한다. 불특정 다수가 보는 만큼 자신이 글을 통해서 표현한 의도를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없이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중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글, 다시 말해서 어려운 글이 무조건적으로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결코 그 비판은 합당하지 못하다. 대중적인 소재를 사용해서 전개하는 글이라 하더라도 전문적인 영역으로 가는 순간 (그것이 인문학이든, 영화이든, 정치학이든) 그냥 봐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글이 탄생한다. 그 영역에서 쓰이는 개념적, 관념적 용어가 적어도 한 개 이상은 출몰하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용어를 모두가 이해하기 위해 글에서 일일이 풀어 쓰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설령 풀어쓴다 할지라도, 정작 풀어쓰기 위해 사용한 글이 독자에게 큰 어려움을 주거나 더 큰 오해를 주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간혹 리처드 파인만같은 사람들이 불특정 다수의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책을 내지만, 그건 정말 '간혹' 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개념어를 부연 설명없이 그대로 집어넣는다.

 

별다른 내용이 없는 글을 단순히 '있어 보이려고' 각종 현학적 수사로 포장하는 것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 교수가 쓴 글은 비록 독해가 어려울지라도, 전하고자 하는 의도나 글 전체적인 완성도는 탄탄한 편이다. 글 중간에 쓰인 '리비도', '정언명령', '초자아' 등의 철학 · 인문학적 개념은 일반인은 자주 사용하지 않지만, 인문학에서는 평범하게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블로그에 올려 많은 사람들이 보도록 한 글인만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단지 내 자신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글 자체를 공격하고, 필자에게 무조건 이해하기 쉬운 글을 쓰도록 요구하는 것은 하나의 폭력에 불과하다. 쉬운 글도 필요하지만, 어려운 글 또한 존재 가치가 있다. 전자는 대중들이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점에서 중요하고, 후자는 전문적인 방향에서 심도있는 분석을 해 다양한 시점을 낳는다는 점에서 필요하다. 두 가지 방향의 글 모두 상호 보완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단순히 한 쪽 방향을 옹호하는 것은 불균형적인 상황을 만들 가능성이 크다. 다른 성향의 글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2010년 2월 8일 게재 칼럼. 아쉬운 부분에 대해서 불편함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불편함을 넘어 필자에게 압박을 가하는 순간 그것은 폭력이 된다는 사실을 항시 깨달아야 할 것이다. 당신에게 어렵다는 것이 필자를 무작정 비난하는 것을 결코 정당화시켜주지는 않으니까.

언론이 해야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지난 7월 말, 평택 쌍용자동차가 한창 파업 중일때, 한 노동자의 부인이 사망하였다. 그 병원이 바로 우리 집 옆이기도 해서, 취재가는 길에 잠시 찍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도대체 바이러스에 왜 들어왔던 것이었을까? 지난 3년간 모 만화 평론 웹진에서 글도 1년에 몇 번 밖에 올리지 않는 필진 생활을 해왔던 것이 그 당시까지 경력의 전부였고, 바이러스에 지원서를 넣었던 당시도 한겨레 학생 기자 1차 모집에 합격이 된 상태였다. 어쩌면 언론 생활을 단순히 '경력 쌓기의 수단'으로 여겼었던 건지도 모른다.

 

갑자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면, 지난 일 주일 동안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일은 김만중 선배 기자님과 같이 평택에서 밤을 새다가 겪은 사건이었다. 그 때, 쌍용자동차의 한 노동자의 부인이 방 안에서 목을 매달고 자살하는 일이 발생하고 병원에 시신이 안치되었는데 하필 그 병원이 내가 사는 집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이었다. PIFAN 취재를 막 마치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왠지 모르게 가봐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내가 사는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으니까.

 

현장의 분위기는 매우 슬프면서도 험악했다. 먼저 현장에 도착해있던 만중 기자님과 유족들의 말에 따르면 기자들이 마구 도둑 취재를 했다고 한다. 유족들의 슬픔이 극에 달해있는 상태에서 기자들이 특종 보도를 위해 허락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마구 촬영이 이루어졌고, 결국 모든 취재를 중단하는 일마저 생기게 되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기자의 의무 중 하나는 현장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지만, 한편 이 의무는 다른 사람들의 심기를 상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뒤 만중 기자님, 그리고 세 명의 노동자분과 함께 호프집에서 자세한 대화를 들을 수가 있었다. (자세한 상황은 http://www.1318virus.net/modules/news/view.php?id=14311에서 확인하기를 바란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노동자들은 지금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계속 언론에 대한 실망감을 표출하였다. 그동안 많은 언론에서 자의적인 해석을 해왔다, 현장의 소식을 보도하지는 못할망정 노동자를 매도해서야 되겠느냐. 그리고 한 노동자 분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이가 어린 학생은 언론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것이었을까.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나로서는 별로 탐탁치않은 답변이었다는 것밖에는. 모두들 일부 언론의 취재 행태에 대해서 기가 찬 분위기였다. 심약한 나로써는 '일부 언론'으로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는 신문사, 방송사들은 경제 논리와 효율성을 앞세운채 겉으로만 공정성을 앞세운 보도를 일삼았다. 나는 과연 이런 보도 논리에 자유로웠는가. 부끄러워서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대화가 끝났는 지는 이제 생각이 잘 나지도 않는다.

 

두 번째 일은 미디어법이 한나라당(그리고 친박연대, 자유선진당)에 의해 강제로 통과된 사태였다. 한나라당이 어떻게 법안을 통과시켰고, 그 와중에 어떤 추악한 일이 발생했는 지에 대한 것은 따로 언급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개인적으로 혼란스러웠던 것은 이번 사태에 대한 각 언론들의 생각과 문화 쪽의 생각이 약간 씩의 차이를 보였다는 점이었다.

 

나는 지금 언론 활동을 주로 하고 있지만, 사실 본업은 문화계 쪽이다. 문화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미디어법에 반대하는 분위기이지만, 일부 인사들은 미디어법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자본이 많이 들어오니 지금보다 더 돈을 많이 들인 작품이 나올 가능성이 크며, 새로운 방송사는 지금보다 더 자유로운 경영진들이 방송을 꾸릴 것이니 더 참신한 프로그램이 나오지 않겠느냐. 지금까지의 대기업의 경영 방식을 보면 이 논리에 반대하기도 찬성하기도 어렵다. 대기업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거둔 사례도 있었고, 완전히 망친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반반 정도라고 할까.

 

게다가 '일부 언론'들과 전자 / 경제 계열의 언론들은 미디어법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자세를 보였다. 전자 / 경제 매체들이 독자들, 그리고 관련 스폰서들의 수익을 위해 찬성하는 보도를 내놓는 것이 현실이라고 치더라도, 그 '일부 언론'들의 행태는 현실을 도의적으로 무시하는 것인지. 정부의 논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논리를 구사하고 있었다. 언론인지, 기관지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지금 한국의 언론은 포화 상태이다. 정론지를 지향하는 언론들도 있지만, 권력에 빌붙으려는 언론도 존재하고, 현실을 왜곡하려는 언론들도 존재한다. 지금 <인터넷뉴스 바이러스>는 어떤 위치에 서있는가? 청소년 언론 중에서는 지속적으로 자체 기사를 계속 생산하고, 정열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유일한 언론이지만 광고를 전혀 받지 못하고 후원과 기자들의 개인적인 경제 활동에 재정을 의존하고 있다. 정부의 지원금은 작년부터 끊긴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전에 학원을 소개하는 기사가 독자들로부터 광고성 기사로 오해받는 해프닝을 만든 적도 있었다. 만약, <바이러스>가 상황이 조금 나았더라면 이런 오해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단연 <바이러스>만 어려운 상황은 아니다. 이미 전 언론의 수익이 전부 감소한 상황이고, <한겨레>는 상여금을 전부 반납했고, <경향신문>은 월급이 계속 밀리는 일마저 발생했다. 최초의 인터넷 신문이자 한국에서 인터넷 신문 1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오마이뉴스>도 사원 전원이 월급을 반납하고, 공개적으로 후원을 부탁했다. 여러가지 상황들이 언론들의 위치를 위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과 자본에 영합하려는 언론이 계속 생겨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자식들에게,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언론인이 되고 싶다면, 후세에 자랑스러운 언론이 되고 싶다면 어려움에도 상관없이 사건의 폐부를 노리는 기사를 만들어 내야 한다. 묻혀있는 사람들과 사건들을 발굴해 내야 한다. 같은 사건이라도 어떤 방식으로 소개할지는 다각도로 판단해야 한다. 무엇보다 언론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에 일조를 해야한다. 기자들은 일반인들에 비해 더 높은 위치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특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쌍용차 사태와 미디어법 취재 행태에서 보듯이, 지금 일부 기자들은 이 특권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용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언론인으로써 매우 부끄럽다.

 

지금 내 모니터 앞에는 몇 달전에 발급된 정식 기자증이 놓여있다. PRESS와 내 이름 석자가 박힌, 부끄러우면서도 자랑스러운 나의 첫 기자증. 이제 나는 집 주변 호프집에서 보았던 쌍용차의 노동자들과, 미디어법 저지를 위해 노력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계속 기사를 써야한다. 밤을 새고 피곤할지라도, 나는 이 길을 선택했으니까. 진정한 언론인이라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진실, 그리고 미래를 위한 기사를 써야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아니, 그게 정답일 것이다.

 

* 2009년 7월 29일에 올라온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칼럼. 하도 복잡한 기운이 얽혀있는 상태에서 쓴 칼럼이다. 쌍용차 사태가 계속 심화될 쯤, 그리고 미디어법이 날치기 통과되고 몇 일 후에 쓴 글이라서 더 심란한 심정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현재 활동하는 언론인이라서 (계속 할지는 모르겠지만) 언론인은 어떤 책무를 가져야 하고, 어떤 일을 해야하는 지를 쓰고 싶었다.

review 「거북이 달린다」 - 권위 잃은 가장, 권위 잃은 공권력

 

*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주 한 주 마다 기분이 안 좋은 소식만 들려옵니다. 뉴스를 보니 이번에 서울시에서 시청 광장과 앞으로 문을 열 예정인 광화문 광장의 ‘폭력’ 행사를 제한하다는 군요. ‘폭력’의 징후가 느껴지거나 시위로 변한 징조가 보이면 허가를 내리지 않겠다는데 서울시가 신도 아닌데 어떻게 그것을 미리 판별을 하는 것인지가 의심스러운 가운데, 학생들은 학교에서 신문을 보면서 공권력을 욕하고 있습니다. 공권력이 점점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권위를 잃어 가고 있는 이 때, 공권력은 갖은 애를 써가면서 권위를 세우려고 합니다. 꼭, 구시대적 가부장이 폭력으로 권위를 유지하려는 것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본 영화 「거북이 달린다」(제작 씨네2000, 감독 이연우) 는 솔직히 말하자면 제작 발표 당시에는 보기가 무척 꺼려졌던 영화였습니다. 별 볼일 없는 시골 형사가 탈주범을 잡는다는 줄거리에서 주연 김윤석의 전작인 「추격자」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추격자」에서 김윤석 씨가 맡은 중호는 전직 형사였고, 이번 작품에서 김윤석 씨가 맡은 역할인 조필성 역시 사고를 치는 바람에 정직 3개월 처분을 받은, 형사 아닌 형사입니다.

 

필성은 직장인 경찰에서도 그럭저럭 살고 있고, 가족에서도 만화방을 하는 아내 (견미리 분) 의 핀잔을 받으면서 사는 주위에 흔히 있을 법한 가장입니다. 그나마 각각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딸이 그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어떤 경우에도 친절히 대해주는 삶의 위안인 존재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필성의 마을에 소싸움대회가 열리고 기적같이 필성은 판돈의 6배를 따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피신해온 탈주범 송기태를 만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계속 꼬이게 됩니다. 형사 체면에 범인에게 얻어맞고 돈도 빼앗겼기 때문이죠. 오히려 필성은 동료와 아내 둘에게서 술에 취했냐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한 번 싸우지도 못하고, 집안에서도 아내의 잔소리만 듣게 된 처지에 놓인 필성은 오기가 단단히 붙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아무도 필성이 탈주범 기태를 만났다는 소리를 믿지 않는 상태에서 필성은 그의 아지트를 발견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제야 마을 사람들은 기태가 마을에 있다는 것을 믿게 되지만, 서울에서 온 형사들과 시골 형사들 간의 알력이 붙으면서 검거 계획은 걷잡을 수 없이 꼬여갑니다. 오히려 서울 형사들은 필성이 겨우 기태를 잡을 뻔한 상황에서 방해만 놓게 됩니다.

 

필성이 기태를 잡는 것에 전력을 다하는 것은 권위 살리기의 일종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필성이 기태를 만나기 전에도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좋은 처지를 받지 못하는 상태였고, 게다가 기태에게 얻어맞으면서 약간이나마 있던 권위마저 산산이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그 권력으로 약간의 ‘용돈’을 받아올 수 있던 필성은 모든 권위가 사라지게 되자 철저히 자신의 권위를 살리는데 집착을 하게 되고, 그 표출 대상이 물리적으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기태를 잡으려고 하는 것으로 풀게 됩니다. 탈주범을 잡아서 포상금도 받고, 특진도 하고, 아내에게서 인정도 받고, 일석삼조가 아니겠습니까.

 

서울 형사와 시골 형사의 주도권 다툼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시골에 내러온 서울 형사들은 의도적으로 시골에 대한 비하심을 표출하면서 곧 기태를 잡을 수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기태에게 역으로 당하거나, 퇴물 형사로만 생각했던 필성이 의외의 (사실은,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 필사의 힘을 다하는) 활약을 보이면서 서서히 시골 형사들의 주도권이 생기자 갑자기 서울 형사들은 기태를 잡기보다 필성을 잡는 것에 - 특별한 죄목도 없습니다. - 힘을 기울이게 됩니다. 권위가 있던 자들이 권위가 무너지고, 권위가 없던 자들에게 권위가 생기니 두 세력들은 귄위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영화는 앞서 말했던 대로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습니다. 필성은 필사의 사투 끝에 필살기 (?) 로 기태를 붙잡는데 성공하고, 서울 형사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한 채 ‘물만 먹게’ 됩니다. 물론 특진과 포상금을 받게 되고, 직장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필성의 권위는 올라갑니다. - 사실 가정에서 필성의 권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소재는 아내의 말투와 표정입니다. 평소에 항상 불만적인 표정을 보이던 아내는, 그가 범인을 잡게 되고 나서야 활짝 웃는 표정을 그에게 보여 줍니다.

 

사실 권위가 원래 (약간이라도) 있던 자들이 그나마 가지고 있던 권위가 사라지게 되면 다시 그것을 찾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예전의 (조그많지만 그래도 쏠쏠했던) 영광은 그것을 겪어 본 자에게는 달콤한 마약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전혀 승산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탈주범의 은신처를 밝혀내고, 검거까지 한 필성의 대단한 기록은 예전에 지녔던 경찰로서의,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청와대, 경찰, 검찰에서 보여주는 정책들은 어떤가요. 항상 그들은 지난 1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려온 자들이 권위를 깎아왔다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필요 없었던’ 권위를 줄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앞에서 말했던 ‘사실상 집회, 시위 허가제’같은 정책들로 필요한 권위를 그들 스스로 깎아먹고 있습니다. 필성과 시골 형사들이 얼마 안 남은 권위를 살리기 위해서 범인을 잡는 노력을 보인 반면에, 지금 정책을 추진하는 ‘윗분’들은 범인의 편에 서서 시민들을 때려잡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권위가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것은 그 옛날 5, 60년대 한 영국 기자가 말했던 ‘쓰레기통에 장미가 피어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영화万보기」2009년 6월 23일 기사. 아직도 이 영화가 김윤석 씨의 전작 「추격자」(감독 나홍진) 을 따라한 영화로 알고 있는데, 전혀 아니다. 물론 포스터 이미지로 봐서는 그런 이미지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건 페이크. (…) 제목이나 포스터가 더 영화에 어울렸다면 관객이 더 들 수 있을 것 같은 수작.

 

청소년의 인권을 잘 다룬 영화, 「시선 1318」

 

* 일부 스포일러가 들어 있습니다.

 

토요일, 편집회의가 편집부 개개인의 사정으로 미뤄지고서 본 기자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서 무척이나 난감했습니다. 평소에는 학업과 기사 작성과 블로그 관리의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치여서 푹 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갑작스럽게 휴가가 주어지니 은근히 심심하더라고요. 그래도 어떡해요. 놀기는 놀아야죠. 대신 인터넷뉴스 바이러스에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놀기로 결정했습니다.

 

가보고 싶었지만 평소에 가볼 일이 많지 않아서 가지 못했던 이화여자대학교의 ECC 내부에 있는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최근 개봉한 「시선 1318」을 보기로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ECC는 이화여대생들 조차도 지나친 상업성으로 비판을 받고 있는 곳인데 단 하나, 아트하우스 모모만은 비판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영화사 백두대간에서 직접 운영을 하고 있고, 국내에 몇 안되는 독립영화 개봉 전용관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죠.

 

영화 시간 10분 전이 되어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역시나, 독립 영화나 소규모 개봉 영화가 흔히 그렇듯이 관객은 절 포함해서 10명이 채 넘지 못했습니다. 청소년의 삶을 다루는 영화인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았으면 했는데, 아직까지는 갈 길이 머나봅니다. 10분이 지나고,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습니다.

 

「시선 1318」의 처음을 장식한 방은진 감독의 「진주는 공부중」는 뮤지컬 형식의 영화입니다. 말그대로 영화 중간에 등장 인물들이 뮤지컬처럼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춥니다. 해외에서는 자주 시도하는 영화 기법이지만 국내에서는 흔하지 않은 기법이어서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영화는 여자 중학교의 두 명의 진주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만 다르고 이름은 같지만, 학교에서 두 명에 대한 처우는 극과 극입니다.

 

먼저 첫 번째, 박진주. 공부를 엄청 잘해서 한 번도 반 1등은 물론이오, 전교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는 이 학교 최고의 수재입니다. 하지만 수재이면 뭐합니까. 엄마와 아빠의 간접적인 1등에 대한 압박에 매일 밤을 새가면서 공부만 합니다. 쉬는 시간? 그런 것은 박진주의 생활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마진주. 이 진주도 1등은 1등입니다, 뒤에서. 역시 한 번도 (뒤에서) 반 1등은 물론이오, (역시 뒤에서) 전교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는 이 학교 최악의 두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마진주의 생각은 다른 아이 누구보다 더 뛰어납니다. 자신이 공부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기가 죽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신이 잘 할 수있는 것을 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박진주가 부모님과 주위의 공부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는 나머지 그만 걸어가다가 ;왕따를 당하는 환상;을 보고서 쓰러지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정신과 의사는 그녀에게 조언을 합니다. 조금만 여유를 가지라고. 그런데 이 병원에는 마진주도 있습니다. 알고보니 ADHD라네요. 이런 우연으로 박진주와 마진주는 친해지게 됩니다. 그곧 기말고사가 다가오고, 박진주는 마진주와 함께 그동안 겪지 못했던 최대의 모험을 하게 됩니다. (자세한 것은, 영화를 직접 보시길 바랍니다.)

 

이 단편은 전교 1등이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지 않고, 전교 꼴등이라고 해서 반드시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회가 청소년에게 갖는 편견 하나, '공부를 못 하면 사람이 못 된다'를 정면에서 거부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잘 한다고 꼭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이어서 상영된 단편은 전계수 감독의 「유.앤.미」입니다. 여기 소년과 소녀가 있습니다. 소년은 내성적인 성격입니다. 이런 성격을 걱정한 부모는 독단적으로 호주로 유학을 갈 것을 결정합니다. 소녀는 역도부 선수입니다. 곧 지역예선에 나가야 하지만, 과연 자신이 가야할 길이 역도 하나 뿐인지가 의심스럽습니다. 자신이 가야할 길을 자신이 결정하지 못한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서로는 서로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연하게 만남으로써 둘은 서로를 이해하게 됩니다.

 

사실 이런 경우, 주위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길은 청소년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부모들, 그리고 어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봐라, 이렇게 안 하면 나처럼 된다. 그러니까 너는 ~ 해야 한다.' 식의 강요만 청소년에게 할 뿐입니다. 직접 말을 하지 못하지만 마음 속에서 꾹꾹 눌러 담아온 소리를 이 영화는 어른들에게 들려줍니다.

 

다음 단편은 이현승 감독의 「릴레이」입니다. 한 여고의 어떤 반에서는 매일같이 비밀 작전이 벌어집니다. 왜냐하면 이 반의 어떤 한 아이가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와 떨어지기가 싫어했기 때문이죠. 반 아이들 모두는 이런 사정을 이해하고 학교에서 아이를 키우는 대장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 이 일은 학교 선생님들에게 들통이 나고, 학교 선생님들은 회의 끝에 아이를 보호 기관에 보내기로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선생님들의 독단적인 결정에 반대하고 아이를 지켜내기 위한 작은 싸움을 하게 됩니다.

 

영화는 특이하게도 관객이 직접 사건을 쳐다보는 것처럼 진행됩니다. 등장 인물들은 마치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나레이션을 합니다. 또 일부 컷에서는 뉴스 형식도 빌립니다. 학교의 선생들의 의견을 물어보면서 마치 9시 뉴스에서 나오는 것처럼 교사들은 대화를 하고 카메라도 비슷하게 움직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중요한 의의는, 편견없이 청소년 비혼모 문제를 다룬 몇 안되는 영화라는 것 일겁니다.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됩니다만, 현실은 아직 영화처럼 진행되지 않습니다. 무조건 청소년들에게 학업과 양육의 길을 강요합니다. 왜 학교에서는 비혼모 청소년을 '계도'하려고만 할까요? 현실과 영화의 괴리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어서 「시선 1318」 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특이한 작품인 윤성호 감독의 「청소년 드라마의 이해와 실제」가 상영됩니다. 사실 이 영화, 딱히 줄거리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관객으로서 알 수 있는 정보는 이 영화의 시간대가 재작년 대통령 선거 전 날을 다루고 있다는 것과 어떤 소년들은 아주 유치하게 말싸움을 하고, 어린 연인들은 사랑싸움을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싸움을 있는 요소는 단 하나, 이 옆에서 여자아이 한 명이 죽었다는 소문입니다. 그리고 영화 내내 여자아이의 유령이 나와서 화면을 지글거리게 만들고 초점을 흔들리게 만듭니다.

 

영화는 마치 청소년 드라마에 대한 이론을 수업하는 것처럼, 무척이나 교과서 같은 제목을 달은 챕터별로 전개됩니다. 전작 「은하해방전선」처럼 윤성호 감독 특유의 작지만 속깊은 위트는 여전합니다. 정치를 잘 모르는 청소년들은 재미있어 보여서 허경영을 찍고 싶어하고,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명박에게 표를 줄 것을 어머니께 권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청소년 드라마가 항상 그렇듯이, 어쨋거나 해피 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제, 김태용 감독의 「달리는 차은」이 「시선 1318」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새만금 주변의 작은 어촌으로 보이는 시골 마을, 차은이는 이 곳에 있는 작은 중학교의 육상부 선수입니다. 육상부 코치 선생님이 이 곳의 육상부를 폐쇄하고 같이 서울로 전학을 가자고 권하지만, 어부인 아버지는 집안 사정때문에 어렵다고 합니다. 코치님도 칭찬한 달리기 실력인데, 차은이는 아버지가 밉기만 합니다. 아버지도 밉지만, 아버지가 재혼한 필리핀인 어머니는 더 싫어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새로오신 어머니를 소개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차은이의 어머니가 필리핀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악의는 없지만) 아이들은 차은이를 놀립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자꾸만 전학을 반대하자,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퍼한 차은이는 집을 나옵니다. 하지만 어느새, 자신이 그렇게도 싫어했던 필리핀 엄마가 트럭을 타고서 쫓아오고 모녀의 짧은 여행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차은이는 자신이 무시했던, 물 건너에서 온 두 번째 어머니가 자신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화는 두 번째 영화였던 「유.앤.미」와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 이주 결혼을 한 두 번째 어머니라는 요소가 추가되었습니다. 뛰어난 육상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이해하는 단 한 사람은 한국 사람이 아니라 필리핀 사람입니다. 같은 여자로서 차은이의 마음을 이해했던 것일까요. 영화는 그렇게 청소년 문제와 여성 문제, 그리고 이주 결혼 문제를 한데 버무립니다. 그 버무림은 결코 따로 놓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주제와 다른 시선으로 청소년을 다룬 영화 「시선 1318」은 막을 내립니다.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 시선 프로젝트답게 이번 영화 모음집도 상당한 수작입니다. 아쉽다면 여성 청소년의 심리에 치우친 면이 있고, 정부가 작년부터 국가인권위원회의 예산을 대폭 감소하는 바람에 당분간 이런 영화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영화를 잘 보고서 집으로 가는 길에도, 앞으로 이런 영화를 못 본다는 사실은 제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이런 영화마저도 '쓸데없는 예산'으로 치부받는 현실이 밉기만 합니다.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의 영화 칼럼 <영화万보기>, 2009년 6월 15일 올라온 칼럼. 메인에는 「다섯 개의 눈으로 바라보는 청소년의 삶」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당분간 보지 못 할 시선 프로젝트의 최신작「시선 1318」, 많은 사람들이 보셨으면 합니다. 박보영 씨, 남지현 씨, 오지혜 씨, 성지루 씨, 문성근 씨, 정유미 씨 팬들도 보셨으면 좋겠네요.

 

청소년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경찰은 정권을 지킨다

ⓒ Skyjet (성상민)

 

꼭 작년을 보는 것만 같았다. 어제 시청 광장에서 열렸던 6.10 범국민대회는 그동안 억눌려있던 시민들의 감정이 폭발하는 장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인 것은 청소년들이 위협받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들고 일어난, 청소년 시국 선언 발표 현장이었다. 주위에 있던 시민들, 심지어는 기자들마저 청소년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박수로 화답했다.

 

선언을 발표한 청소년들이 밝힌 것처럼, 청소년은 굵직굵직한 역사의 현장 속에 언제나 있었다. 마산에서 김주열 군이 이승만 정부의 부정 선거에 항거하다 얼굴에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사건은 4.19의 기폭제가 되었다. 4.19에서도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모든 연령층의 청소년들은 자신의 목숨이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실제로 그 당시 집회에 참여한 청소년이 경찰이 발포한 총탄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가만히 있지 않았다. 부마 항쟁에서도 5.18 광주 민주화 항쟁에서도 청소년들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갈수록 입시 전쟁 속에 심신이 지치는 와중에도 많은 인원이 온라인으로, 오프라인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현실적인 굴레인 입시마저도 청소년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현안에 대한 청소년의 입장과 활동은 20대보다 더 명확하고 활발하다. 3년 후에 있을 선거 결과의 향방을 쉽사리 예측하지 못하는 것도 지금 청소년들이 선거권을 얻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라는 본연의 목표를 위하여 나선 청소년들은 감히 본 기자가 예측하건대 앞으로 실질적 민주주의 발달과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청소년들을 보았으니, 그와 정반대편에 서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자. 그 사람들이 누구인가? 바로 시위 현장마다 시민들을 '즐겁게' 맞이하는 전투 경찰, 일명 전경들이다.

 

ⓒ Skyjet (성상민) = 참고로 사진은 동아일보 앞에서 촬영.

 

전경들은 이번 6.10 집회에서 명성을 다시 한 번 드높였다. 노동절 집회에서 전경 수장이 시민들을 향해 장봉을 휘두른 것으로는 모자랐는지, 이번에도 어김없이 휘둘렀다. 심지어 진보신당 칼라 TV의 한 리포터도 취재 도중에 맞는 봉변을 겪었다.

 

시민들이 전경에게 분노의 마음을 갖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조금만 거리로 나서기만 하면 군홧발과 채증, 장봉 난무를 한다. '정상적인 생각을 지닌' 시민들 중에서 좋아할 이가 있을 수가 없다. 불꽃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일부 전경들의 미니 홈피에 시민들의 폭력을 좋아하는 글이 올라와 전경에 대한 인식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물론 모든 전경이 자신들이 하는 행동을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부 전경이 폭력 진압에 자책감을 가지고 진압 거부를 한 사례가 있는 것을 보면 모든 전경들이 폭력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경들의 인식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경찰은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지 않은가? 정권이 올바른 정책을 가지고 있으면 또 모르나, 자신들만을 위한 정책을 구사하고 있는 정권을 좋아할 턱은 없고 그들을 비호하기 위한 자도 결코 좋아질리 없다.

 

청소년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시청 광장으로 나왔고, 경찰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정권의 수명을 지키기 위해서 광장의 시민들을 강제 진압했다. 둘 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나온 것이지만 그 수준과 평판은 현격한 차이가 난다. 정말로 경찰, 정부는 자신들의 행동이 부끄럽지도 않은 것일까? 온갖 퇴보하는 교육 정책으로 혹사당하는 청소년들마저 의식있는 행동을 하는 이때, 부끄러움마저 모르는 정부는 추한 행동만 보이고 있다.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6.10 범국민대회 취재를 마치고서 쓴 일종의 후기성 칼럼. 2009년 6월 11일에 올라왔다. 하긴 부끄러웠으면, 이딴 짓도 안 했겠지.

1987년의 6.10, 그리고 2009년의 6.10

지금으로부터 22년 전, 서울은 전두환 정권의 독재 정치에 항거하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계속되는 시민들의 비판을 호헌 조치라는 '점잖아 보이는' 수단과 백골단이라는 '폭력적인' 수단으로 밟아 눌렀던 전두환 정권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전두환 정권의 온갖 자행들을 참지못한 시민들은 대학생 박종철 씨가 물고문으로 사망했고, 그 사실을 정부에서 조작적으로 은폐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거리로, 거리로 나왔다.

 

그 날, 장충체육관에서 전당대회의 분위기에 취해있던 당시 여당 민정당은 '그 날이 앞으로 역사에 어떤 이름으로 올라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단지, 전두환의 후계자로 노태우가 지명되었다는 사실만 기뻐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순간은 잠시였다. 시민들은 최루탄 속에서도 계속 거리로 나왔,고 정치에는 관심이 없을 것처럼 보였던 '넥타이 부대'들도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정권은 굴복했다. 정권은 민주주의라는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 시간에, 뉴스 시간에 가끔 접하는 '6.29 선언'이었다. 지금은 역사 속의 사건으로 여겨질 뿐이지만, 그 선언문을 위해서 수없이 다치거나 최루탄을 맞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렀다. 20세기는 이미 흘러간 역사가 되었다. 이제 한국은 더 이상 '통일주체국민회의' 같은 선거 장난질을 치지 않는다. 그러면, 한국은 어느 나라 못지 않은 민주주의를 이룩했는가. 글쎄, 만약 그렇게 본 기자에게 묻는다면 과거에 비해선 민주주의의 위상이 높아졌으나 아직도 부족한 점이 있다고 대답하고 싶다. 아니, 1년 전부터 부족한 민주주의마저도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대답하고 싶다.

 

분명 '그 날'이후로 표면적인 민주주의는 발전했다. 정부가 신문을 검열하지도 않고, 노동조합 분쇄 공작을 하지 않는 등 표면적으로는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겉으로 보이는 민주주의에 취해 있을 때,  실질적인 민주주의는 퇴보했다.

'6월항쟁 이후 벌어진 노동자 대투쟁, 그리고 상계동 철거 사태는 무엇을 의미 하는가? 노동자 대투쟁으로 임금은 올라갔지만 중산층은 그들의 투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약 10여년 후 IMF가 터지자 보란 듯이 정리해고 광풍에 비정규직 양산 붐이 일고 말았다.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살고 있던 마을에 쫓겨난 상계동 철거민들은 시대가 바뀌어도 존재했다. 단지 상계동이라는 이름이 평택 대추리가 되거나, 용산이 되었을 뿐이다. 무작정 진행하는 철거에 대해 사람들은 비판했지만, 자신의 생계에 치여서 그들을 돌아 보지 않았다.

 

그들은 국익 또는 선진화라는 허상의 목표를 위해 자신들이 살고 있던 자리에서 쫓겨났다. MB 정권 들어서 추가된 것은 이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찰이 몸소 알려준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게 했는가? 경제지의 부동산 면을 보면서 재테크에 앞장서야 한다는 입발린 소리에 취해, 우리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질 않았다.

 

어찌보면 겨우 1년 반 동안 진행된 민주주의의 후퇴는 몇 년전, 아니 '6.10' 이후로 예견되어 있던 사태라고 생각된다. 선언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의미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선언' 이후에 진행된 선거는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10년 후로 늦추고 말았고, 민주주의의 표면적 발전과 함께 민주주의의 퇴행도 함께 이루어졌다. '독재 정권이 사라졌으니까 괜찮을 거야'라고 맘을 놓는 사이, 그들의 후예들은 다시 정권을 가져갔고 이제 우리는 그 대가를 치루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위치에 서있는가? 미네르바의 예에서 보듯이 정부 정책에 대해 반대하면 범죄자가 될 수 있다. 국민과의 소통은 이미 유인촌 장관을 통해서 입증되었다. 비판을 하면, '세뇌'라고 생각하면 그뿐이다. 인간다운 삶은 끝장나기 일보 직전이다. 최저 임금을 줄이고, 비정규직은 늘리고 있다. 시민들은 최대한 평화적으로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섰지만, 그들은 소화기와 곤봉, 군홧발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무리한 수사로 인해 자살을 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우리는 22년 동안 민주주의가 발전했다고 여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2년 전과 지금은 비슷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신문 하나를 틀어 막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세상은 아니라는 것과 청소년들의 정치 의식이 성장했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어떡해야 할까? 전경들에게 벌벌 떨면서 가만히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까. 선택은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민주주의의 향방은 결정될 것이다.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에, 6월 10일 메인으로 올라온 기사. 중간 편집 과정에서 <6월항쟁 22주년,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디에 서있는가>로 제목이 바뀌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형식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완비 되었는데, 실질적 민주주의는 아직 멀었음. 아니, 이미 후퇴하고 있음. 그런 상태에서 가만히 있을 것임?'

김씨표류기, 두 김 씨의 생존과 연대를 다룬 크다면 큰 서사시

ⓒ 반짝반짝영화사

 

* 스포일러가 가득 실려있습니다.

 

작년 즈음에 모 주간 영화잡지의 영화 제작 안내표에 정체를 알 수없는 물건이 들어왔다. 제작 중인 영화에 떡하니 실려있는  「김씨표류기」. 한국에 드디어 표류를 다룬 재난 영화가 만들어 지려는 것인가 싶었는데, 감독 이름을 보니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든 이해준 감독이다. 감성적이고 느린 페이스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 표류 영화를 다룬다? 시놉시스를 보니 표류는 표류인데, 한강 밤섬에 표류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한다.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1년 동안 가졌던 의문은 지난 주에 직접 영화를 봄으로서 풀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남자 김 씨(정재영)의 '밤섬 표류'와 여자 김 씨(정려원)의 '방 안 표류' 를 교차하면서 다루고 있지만, 이 표류의 안에는 한국의 20대가 처해있는 현실이 숨어있다.

 

남자 김 씨는 표류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 평범하게 자라나서 평범하게 학교 생활을 하고 졸업해 평범한 직장에 들어가 평범한 연애를 하던, 그야말로 평범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경제 악화는 그런 김 씨의 삶에 풍파를 가져오고 말았다. 구조조정으로 회사에서 갑작스럽게 짤려, 돈을 빌렸는데 회사에 쫓겨났으니 신용 불량자로 전락당해, 게다가 냉정한 여자 친구에게 생각할 시간도 없이 결별당한, 평범한 삶에서 최악의 삶으로 전락하고 만다.

 

여자 김 씨의 삶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외모 콤플렉스로 인해서 고등학교에서 전따를 당했었고, 그 충격으로 3년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컴퓨터만 하는 삶을 살아왔다. 얼핏보면 남자 김 씨가 더 나은 인생을 살아온 것 같지만 시대의 물결에 휩쓸려 순식간에 '88만원 세대'보다 못한 처지가 되어버린 남자 김 씨나, 주변 사람들의 공격으로 온라인 상의 관계만 유지하는 여자 김 씨나 사정은 비슷하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사회의 나락에 처박혀버린 것이다.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지만 서로를 몰랐었던 그들은 여자 김 씨의 취미인 천체 관측으로 인해 단방향적 관계를 맺게 된다. 우연하게 여자 김 씨가 한강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다가 밤섬에 표류한 남자 김 씨를 보게 된 것이다. 남자 김 씨는 여자 김 씨가 자신을 보고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지만, 여자 김 씨는 남자 김 씨에 대해 점차 특별한 관심을 보내게 된다. 여자 김 씨의 '노력'으로 둘은 와인병 편지와 돌로 불완전하고 느리지만 '서로 소통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심지어 한 쪽은 상대방의 얼굴조차 모른다) 이루어지는 양방향 교류는 인터넷 상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을 형상화시킨 것 같다. 인터넷은 익명의 공간이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없다는 점에서 불확실성을 느끼며 꺼려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현실보다 격의없는 사이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거나 확실해지기 어렵다. 익명성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동시에, 상대방을 잘 모르기에 때문에 쉽게 의심하거나 서먹해지게 만든다. 영화 상에서도 남자 김 씨가 무심코 전달한 '당신은 누구신가요?' 라는 말이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던 여자 김 씨에게 큰 상처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 일 이후 한동안 서먹서먹하던 두 김 씨의 관계는 결국 한강 경비대가 남자 김 씨를 발견함으로써 큰 위기를 맞게 된다.

 

평범하게 지내오다가 자신에게 '배신'때린 사회에 들어오기 싫은 남자 김 씨와 자신을 따돌린 사회가 무서워 숨어 지내오던 여자 김 씨 모두 사회를 거치지 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서로를 잘 모르고 피상적인 관계는 맺기 쉬운 동시에 부서지기도 쉽다. 두 김 씨는 사회적 약자의 연대를 형성했지만 조그만 오해나 사회의 공격에(영화에서는 한강 경비대, 의도적인 공격은 아니었지만) 약했다.

 

한강 경비대가 남자 김 씨를 여의도 근처에 아무렇게나 버려두고 나서, 여자 김 씨는 그를 찾기 위해 그동안 무서워했던 사회에 뛰어든다. 여자 김 씨가 사회에 대한 공포를 뛰어 넘고서 남자 김 씨를 보기 위해 집 문턱을 나선 것은 작지만 크나큰 사건이다. 표면적인 관계에서 더 밀착한 연대로의 진전을 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둘 다 각자의 공간에서 그럭저럭 생존을 하고 있었지만 사회에서 동떨어진 상태에서의 생존이었기에 현실이 개입해올 경우 (남자 김 씨에게는 한강 경비대, 여자 김 씨에게는 '악플') 생존 자체가 어려웠다. 하지만 여자 김 씨가 두려움을 넘어섬으로써 관계는 두터운 연대가 되고 두 사람의 생존 가능성도 커지게 되었다.

 

영화는 두 김 씨가 서로를 끌어안음으로써 끝이 난다. 두 사회적 약자가 만나서 표면적인 관계를 형성하다가 마침내 튼튼한 연대를 만들어낸, 얼핏 보기에는 작아보이지만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큰 서사시가 끝을 맺은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청소년이나 20대 처럼 현재 사회적으로 안 좋은 환경에 놓여있는 사람들도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에는 각종 현실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각자의 목표에서 모두의 목표가 되는 순간 그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더 쉬운 일이 될 것이다.

 

* 「영화万보기」의 그 자랑스러운 (?) 첫 화. 하지만, 1) 기사가 너무 심하게 밀려있는 상태에서 쫘르륵 올라왔고, 2) 개편 때 강하게 요구한 각 주제별 코너 배치는 아직 개편이 안 되어서 맨 밑에 기사가 배치되었기 때문에, 댓글 0개라는 심히 쪽팔리는 출발을 하게 되었다. 사실 코너의 탄생도 현재 기진맥진한 상황에 놓여있는 「적절한 신간」의 땜빵용으로 그럭저럭 만든 것이어서 (사실 원래 이 기사는 블로그용으로 올라올지도 모르는 글이었다!) 비운한 태생의 비운한 출발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뭐, 그러니까 다음 화부터는 댓글을 좀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보다 무한도전 오빠들이 더 중요해요?

ⓒ MBC

 

전국이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충격이 빠져있는 이 때, 평소에도 '무차별 댓글 공격'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디시인사이드와 웃긴대학이 블로그 공격에 나섰다. 왜 그 블로그가 문제가 되었냐면, 한 초등학생 5학년 여자 아이가 노무현 대통령이 죽은 것 때문에 '사랑하는' 전진 오빠가 나오는 무한도전이 결방되었다면서 '왜 지금 죽어서'라고 불평하는 글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 글이 올라온지 하루도 안되어서 블로그 주인장은 댓글 공격에 무척 충격을 받았는지 문을 닫고 말았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한 초등학생이 철이 없어 생긴 해프닝이지만, 이 사건을 들여다 보면서 일부 청소년이 정치보다는 연예인을 더 중요한 위치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학생들의 정치 활동이 뜨거웠던 7 ~ 80년대에 비해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진 90년대부터는 청소년들의 취미 활동이 본격화된다. 문화의 발전이 두드러진 황금시기였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점차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커져 갔다.

 

다행히도 청소년의 정치 무관심은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추모 촛불집회를 기점으로 점차 누그러지고 있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소녀 두 명이 주한미군의 실수로 사망하게 된 것에 격분한 청소년들이 집회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 집회,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로 가면서 청소년들의 정치 / 집회 참여는 점차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전체 청소년들 비율로 보았을때는 아직도 큰 이슈가 있을 때에만 정치를 찾거나, 아예 무관심한 경우가 더 많다.

 

청소년들은 왜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할까? 가장 큰 이유는 재미가 떨어지고 자신들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연세가 많은 국회의원들의 쭈글쭈글한 얼굴보다는 연예인들의 탱탱한 외모가 더 호감이 들고, 청소년에게 있어서는 국회에서 논의되는 각종 현안보다 내 앞에 놓여있는 참고서가 더 급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치에 대한 관심을 아예 놓을 수 없는 것은, 정치는 어떤 식으로든 청소년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적절한 예를 들어보자. 재작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명박 후보는 공약으로 '학교 자율화'를 제시했다. 학생의 희생을 강요하고 사교육이 더 거세질 정책이었지만 유권자의 대다수인 30 - 50대는 '학생 학력 신장'과 '경제 성장'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이명박 후보에 한 표를 행사하였다. 그런데 사실, 이 선거는 잘만 하면 청소년들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선거였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투표권 부여 연령을 만 18세 이상으로 낮추자는 이야기가 나왔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나라당과 만 19세 이상으로 타협을 했지만, 많은 청소년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서 적극적으로 행동했더라면 만 18세 이상으로 투표를 할 수 있는 연령이 낮쳐졌을 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청소년이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방관'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에서 보았듯이 정치는 청소년들과 알게 모르게 관계를 맺는다.

 

그렇다고 무작정 거리로 나와서 집회에 참여하라는 뜻은 아니다. 생활 속에서, 인터넷 속에서 조금이나마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도 청소년의 정치 인식은 조금 씩 나아질 것이다. 물론 나도 이번 주에 무한도전이 결방되어서 아쉬운 시청자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불평하기 보다는 그 뒷 면에 숨겨진 정치 관계에 신경쓰고 이런 일이 없게 하는 것이, 더 좋은 해결책은 아닐까?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에 기자 칼럼 형식으로 2009년 5월 27일에 오른 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초등학생 여자 아이에게 악플 공격은 심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많았었는데, 나는 전 포스팅에서도 말했지만 댓글 공격은 반대하는 입장이다. 단지 물리적 폭력이 없었을 뿐, 사이버 공간 상에서 벌어진 폭력 행위가 아닌가? k2man 님께 이 짧은 추신으로 본 기자의 입장을 전한다.

문화는 정권의 홍보 수단이 아니다

결국 또 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로 잘 알려진 시인 황지우가 19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직을 사퇴하였다. 3년의 재직기간 동안 문화 예술의 진흥을 위하여 정성을 다한 그도 MB 정부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였다. 18일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그의 해임·파면을 요구한 것이다. 해임을 한 구체적인 이유는 공금 유용, 근무지 무단 이탈, 교육과정 부실 등의 이유라고 한다.

 

황 총장은 사퇴 이유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근무지 무단 이탈건을 제외하고 문광부에서 제기한 모든 의혹을 부인하였다. 또, 3월 초에 문광부 예술국장이 방문해 암암리에 사퇴 압력을 가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문광부에서 제기한 의혹들이 사실인지 단순한 서류 처리 문제인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부 고위직 관리가 직접 찾아와서 사퇴를 종용하는 뉘앙스를 풍긴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시기도 묘하다고 할까. 문광부 담당자가 방문한 이후, 바로 정부의 감사가 시작되었고, 결국 황 총장은 자진 사퇴하게 되었다. 단지 황 총장만의 일일까. 자진사퇴를 거부하던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도 사퇴가 거론되는 시기에  정부의 감사가 이루어졌고 해임·파면되었다. 우연의 일치라면 참 놀라운 우연일 것이다.

 

이런 손길은 노무현 정권 때 임명되었던 고위직 관료가 사퇴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KBS2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윤도현의 러브레터」를 진행하던 가수 윤도현 씨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프로그램에서 하차되었고, 심지어는 최근에 나온 8집 「공존 (共存)」의 뮤직비디오마저 '횡단보도가 없는 도로를 건너는 장면은 도로 교통법을 위반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KBS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최근 가수 신해철 씨도 예전에 SBS에서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에서 하차한 이유가 음악 준비가 아니라 정부와 방송국의 압력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나마 사정이 난 MBC에서도 김미화 씨가 방송에서 하차당할 뻔한 일이 일어났다. 지향하는 가치가 다르다는 이유로 문화 예술인의 활동을 탄압하고 있는 것이다.

 

손길은 여기에서도 그치지 않는다. 지난 3월에 시상식이 열렸던 한국대중음악상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을 거부하는 바람에 규모를 크게 축소해야만 했다. 5월 21일에 개막하는 서울환경영화제도 문화체육관광부의 늦장 지원금 집행때문에 영화 상영을 제외한 나머지 행사를 최소화해서 열 예정이다. 두 행사 모두 국회에서 예산이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금을 받지 못했다. '진보적 인사'가 관련이 되어있거나, 촛불 집회 참석 단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의혹이 일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작년까지 추진되었던 독립영화, 다원문화 관련 예산이 촛불 집회와 연관이 있는 예술가가 참여했다는 이유로 크게 줄거나 전액 삭감되었다.

 

물론 MB 정권으로서는 최악의 지지율을 당장이라도 끌어 올리고 싶고, 문화 예술을 그 도구로 쓰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MB 정권은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현재의 주된 문화 향유층인 20 - 30대는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문화를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친MB 성향 인사가 방송문화 관련 고위층에 올라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해도, 20 - 30대의 공감을 받지 못하면 문화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KBS에서 유인촌 문광부 장관의 제의로 '정책 홍보 버라이어티'를 제작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여지까지 검토했던 것이 대부분 추진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조만간 그런 프로그램이 안 나올 이유는 없다. 하지만 시청률 면에서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문화의 독립성을 보장해주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정권 홍보 수단으로 이용하는 관료를 볼 시청자가 얼마나 있을 것인가? 차라리 버라이어티를 제작하는 비용으로 삭감된 독립 영화 예산에 투자하는 것이 더 실용적'일 것이다.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2009년 5월 20일자 메인 기사. 이 자리를 빌어서 한예종 교수협의회 전원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드린다. 성명서를 받았는데, 제가 워낙 게을러서 기사화 못해서 결국 시간이 지나고 말았습니다. 정말, 정말로 죄송해요.